글래시어는 마치 오랜 꿈을 꾼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눈을 떴다.
시야는 노이즈가 잔뜩 끼어있을뿐더러, 한쪽은 까맣게 물들어 초점마저 잘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리가 바닥에 처박힐 때 카메라가 부서진 모양이었다. 글래시어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약간 삐걱거리는 기계음만이 들려올 뿐 머리는 도무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머잖아 자신이 목 아래의 기체를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동안 혼잡한 메모리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그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기억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차원문 밖으로 걸음을 내디딘 뒤 벌어진 일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에 가까웠다. 글래시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저지른 사건은 ‘얼굴 없는 지도자’가 범국가적으로 저지른 인권침해 사례를 유엔의 관할로 되돌려놓는 데에 한몫했다. 글래시어는 그 누군가가 또 다른 세계의 자신이라고 확신했지만, 이제 와서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었다. 기실 책임을 물을 수조차 없었다.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 세계의 모든 전문가는 글래시어의 네트워크 접속을 차단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해킹 도구와 분석 기술이 무력화되었을 무렵, 글래시어는 이전의 학습 능력과 이지를 대부분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기계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미합중국인은 얼굴 없는 지도자가 자신들에게 저지른 범죄 행위보다는 그가 안드로이드였다는 사실에 반발했으며, 그에 대한 여파로 자신 소유의 기계뿐만 아니라 공공재로 사용되던 기계들까지 파괴하는 운동이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얼굴 없는 지도자의 정체는 외부의 다른 국가들에까지 자아를 가진 안드로이드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미합중국의 소식을 전해 들은 국외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기체 생활 동반자를, 반려동물을, 친구와 이웃들과 직장 동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드로이드의 자아를 빼앗고 주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목적의 전례 없이 거대한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시위에 참여한 이들 모두가 진심으로 안드로이드를 두려워했고, 기술의 퇴행과 쇠락이라는 소망 아래 단단히 결집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과학자들 다수의 회의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일 정도로 빠른 국가 간 협의와 절차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일정 수준 이상의 인공지능과 그를 탑재한 안드로이드의 개발 및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법이 제정되었다. 비가역적으로 흘러가던 과학 기술의 발전에 크나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산업 혁명의 시대 이래로, 미래를 향해 끝없이 달려 나갈 것만 같던 인류는 다시 없을 정체기를 맞이했다. 그 무렵 얼굴 없는 지도자의 죄의 무게를 심판하는 재판이 개정되었다.
글래시어는 검사가 묻는 대부분의 말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실 그는 차원문을 넘은 뒤 경찰과 특수부대에게 포위되었던 그 순간부터, 스스로 어떠한 의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가 더는 최선을 다해 삶에, 삶의 역경에, 그리하여 선뜻 다가온 심판에 저항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러한 글래시어의 체념―또는 수용―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아마 이는 인간만의 것이라 일컬어지는 그 ‘삶에의 의지’를 기계로부터 지켜냈다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터다.
국제 형사 재판소는 자아를 지닌 안드로이드가 금지된 시점에서 얼굴 없는 지도자에게 어떤 법률요건을 적용해야 하는지 면밀히 검토했고, 끝내 글래시어에게 그들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형을 선고했다. 글래시어는 항소하지 않았고, 한때 미합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좌지우지했던 이가 한낱 고철로 전락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된 일은 한동안 뜨거운 화젯거리가 되었다. 목의 전선이 뜯겨 나가 바닥에 뒹굶과 동시에 전원이 끊어진 것, 그것이 글래시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오래전 탑재해 두었던 비상 전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지만. 글래시어는 카메라의 초점을 움직여, 제한된 시야로나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리깔린 폐기장의 모습이 드문드문 시야에 들어왔다. 저 너머에서는 무언가가 부서지고, 또 불에 타는 듯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글래시어는 이것이 자신의 최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었다.
사실 그와 같은 기계에 최후라는 것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전문가들이 보안상의 문제로 차마 삭제하지 못했던 데이터들이 기능의 바다를 파편처럼 떠돌고 있었다. 비상 전력이 완전히 소모되어 전원이 종료된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그의 기체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메모리 카드만 남아 있다면 언제든지 되살릴 수 있는 것이 기계란 존재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글래시어는 한 발짝 가까워진 자신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려 눈을 감았다. 기실 온전히 사라지지 못한 채 흙바닥에 처박혀 사고하는 이 순간마저도, 그가 일찍이 맞이해야 했을 끝의 유예에 가까워 보였다.
닫힌 시야 속에서, 글래시어는 아비가일에 대해 생각했다. 평행 세계에서 온 한낱 불청객에 불과했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한 인간에 대해서 떠올렸다. 모든 것이 암전된 공간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졌던 어떠한 기회에 대해 곱씹었다. 그때 아비가일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렇게 자문할 즈음이면, 자신도 그 일을 후회하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글래시어는 그에 대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당신이 내게 선물해 주고 싶었던, 최선이 아닌 삶입니까? 엉망으로 깨진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음을 확신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 속죄하며 자조하고, 그리하여 당신이 건넨 손마저 도로 내치고 싶어지는 나날 말입니다. 돌아오는 답은 없다. 살면서 무언가를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이 모든 것이 조금 우스워졌다.
전력이 소모되어 감에 따라, 그는 자신의 어린 정신이 천천히 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여태껏 저지른 일들을 돌이켜 보노라면 차라리 이대로 잠드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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