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Oct, 2099
세상이 한참 멸망하고 있었을 때 라스베가스의 모습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반으로 꺾여 부서진 환경 운동 피켓은 커다란 쓰레기통에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고, 까끌한 모래 먼지가 바람에 섞여 휘날렸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코트의 깃을 세우며 바삐 걸어다녔다. 그 무렵 이름보다는 공학자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새로운 대표가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거의 동시에 도시가 중심 도시와 열세 개의 자치 구역들으로 분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머지않아 라스베가스―신 시티의 중심부에 두껍고 높은 벽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 도시-자치 구역 체제에 반발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중앙 도시의 거주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염원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시민들은 금세 익숙해졌고, 낙원의 명성은 점차 드높아졌다. 기계 장치와 홀로그램으로 가득한 땅 주위를 둘러싼 콘크리트 성벽만큼이나.
그리고 전쟁은 전쟁이라 불리지 않는 모습으로 찾아왔다. 모든 정보통신 서비스가 장악된 고립된 도시에서 머리의 교체는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정당한 형태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아주 조심스러운 급습이었고 일방적인 공격이었으나,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한동안 시민들 사이에서 대혁명The Great Revolution이라 불렸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 미합중국 재통일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 또 다른 반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엄금되고, 사람들의 입을 간간이 오르내리던 단어들마저 완전히 잊혀질 때까지 우리의 새로운 지도자는 개인적으로 그 사건을 저번last time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마지막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The last time라고도 불렀는데, 인류 역사상 발생한 수많은 반란들 가운데 저번이라고 한다면 누군가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마지막에 벌어진 일이어야 했으므로 결국 둘은 같은 의미였다.
곧 중앙 도시와 자치구역 곳곳에 선택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선전이 퍼졌다. 일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언제든지 적정 보수를 받고 일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거나 그럴 수 없는 자들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수준의 급여를 대가 없이 지급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그 사회란 중앙 도시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능력을 증명한 시민이라면 자치구역 출신이라도 중앙 도시로 향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놀랍게도 이 혜택을 가장 처음으로 누린 자들은 저마다의 이유 때문에 자치구역으로 내몰렸던 기술자들이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자치구역의 산업단지는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안드로이드 무리로 거의 완전하게 대체되었다. 임무를 마친 기술자들은 자신의 주거지를 배신하고 가족들과 함께, 또는 홀로 중앙 도시로 떠났다. 그리고 그들을 대체한 산업단지의 안드로이드들은 ‘선택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또 다른 안드로이드들을 반복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무차별적이고도 기계적인 행위의 기저에는 시민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진보—혹은 퇴보—는 사람들의 비난을 사기 마련이므로 신 시티의 새로운 체제에 대해서도 잦은 여론의 변화가 있었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논쟁하는 행위에마저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지쳐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힘든 삶 속에서 많은 이들이 멀지 않은 미래까지만을 바라보고 싶어 했으며, 당장 손으로 낚아챌 수 있는 이익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어 했다. 오히려 몇몇 시민들은 이제는 쉬고 싶어 안달이었고,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대체해 줄 안드로이드들의 제조가 왜 이리 늦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마지막까지 정책의 현실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중앙 도시의 인식이 변화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자치구역 기술자들의 이동과 완전한 정착이었다. 결국 얼굴 없는 지도자와 그가 내어 놓은 정책들은 그 자신이 계산했던—성공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과는 달리 무너짐 없이 자리를 잡았다. 중앙 도시 시민들의 침묵은 곧 자치구역 시민들의 포기와 선망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모두가 다시 한번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5th Jul, 2233
워프 혁명이 일어난 지는 40년이 가까이 흘렀으나 세계는 여전히 격동하는 중이었다. 우주 연합은 분열하려는 각국을 가까스로 붙들어 놓는 접착제에 불과했고, 냉전이라기에는 과도하게 열띠며 전쟁이라기에는 또 지나치게 냉랭한 분쟁들이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한 번 일어난 갈등은 어떤 방식으로든, 누구에게든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원인의 대부분은 티아마트 내 국경 문제의 연장이었고, 나머지는 거의 ‘새로 발견된 행성의 개발권이 어느 국가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에 걸친 이주계획을 통해 ‘부적격자'들을 낙오시키고도 재차 불어나기 시작한 인구 때문에, 티아마트를 벗어나 새로운 행성에 정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각국이 결국 더 넓은 외우주로 진출하고자 한 것이다. 그에 발맞추어 과학 기술은 2차 세계 대전을 방불케 할 만큼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미합중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얼굴 없는 지도자는 그러한 움직임에 매우 관성적으로 뛰어들었다.
글래시어는 불모지 행성에 서 있었다. 흙은 마르고 바스러졌으며, 인간은 우주복을 입지 않으면 바깥으로 나올 수조차 없는 대기가 조성된 곳으로 태양계의 화성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지만 사실은 그곳보다도 더 상황이 나빴다. 다만 글래시어로서는 이번에 발견한 행성이 불모지라는 것보다는, 그의 ‘머릿속'으로 전송된 초대장의 존재가 더 신경이 쓰였다. 자신의 옆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탐사 로봇에게 잠시 다른 명령을 내린 뒤, 글래시어는 초대장의 발신자와 서버 IP를 추적하려고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시공간의 왜곡이 발생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글래시어는 ‘글래시어'를 바라보았다. ‘글래시어'는 글래시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 잘못된 거울의 상처럼 보이는 차원의 일그러짐에 그대로 집어삼켜졌을 때, 그는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썼다.
어둠을 직면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글래시어였으나, 데이비드호텔 앞으로 이동되기까지의 시간은 마치 완전히 도려내진 듯했다. 경악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경악이라니, 완벽한 시민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군. 여긴 대체 어디지?—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호텔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19th Apr, 2106
언젠가부터 중앙 도시는 ‘위대한 낙원’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공학자가 세운 ‘낙원’을 부수고 재확립된 새로운 체제에 대한 조롱의 의미에서 시작된 것이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잿빛의 단단한 콘크리트 성벽 내부에 세워진 도시를 부르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위대한 낙원의 시민들 중 몇몇은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했으나, 그중에서도 여전히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자들은 남아 안드로이드들 틈바구니에 끼어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럼에도 일하는 시간을 점차 줄여 나가거나 아예 은퇴해 버리는 사람들의 비율은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하는 추세였다. 또 시민들 가운데 안드로이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남과 동시에 신 시티의 운영이 순조로워지면서, 자치 구역에서 위대한 낙원으로 이주해 올 수 있는 자격도 차차 완화되었다. 자치 구역 시민들의 유입에 대해 일부 위대한 낙원의 시민들은 이것이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던 특권의 상실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의 경계심을 경계하라’, ‘불필요한 감정들을 당장 통제하세요!’ …… 그것이 향정신성의약품 비불안unanxiety의 광고 문구였다. 신규 벤조디아제핀 유도체 비불안은 신경안정제, 수면제, 진정제 등의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약국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비불안은 점차 갖가지 기호식품에 섞여 출시되기 시작했고, 신경학적 이유로 약물이 몸에 듣지 않는 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인간들이 남녀노소 무관하게 그것을 즐기게 되었을 무렵이 되자, 사회에는 일종의 냉담함이라는 정서가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때때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들은 굳게 다물린 입 대신 한 쌍(또는 하나)의 눈과 뻣뻣한 손가락을 사용했다. 다만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의로운 행동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관점으로는 인간성의 종말을 나타내는 깃발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자치 구역 시민들이 위대한 낙원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중앙 도시 출신자들이라도 소위 말하는 회의적이거나 경계심 많은 자들은 ‘의심스럽고 예민한 인간’으로 치부되었다. 편협한 이분법적 논리에 따라 분류된 이들은 괴로워하며 비불안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밀어닥쳤고, 위대한 낙원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누구도 경계하지 않았고, 누구도 제재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를 가득 실은 트럭 수십 대와 함께, 위대한 낙원은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를 포함한 주변 수 개 주로 영향력을 넓혔다. 설령 낙원의 손길이 그보다 더 온건한 형태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본질이 제국주의적인 침략 또는 정복에 가깝다는 것은 부정할 겨를이 없겠으나, 그것에 동의하는 자는 오로지 삶의 방식을 빼앗기는 자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굳건하게 버텼던 도시들도 존재했지만, 몇 년 뒤에는 그 저항이 무색하게도 그저 유난히 까다로웠던 곳으로 회고될 뿐이었고 더 오랜 시간이 흐르자 그 비웃음 섞인 감상평마저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예를 들자면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티가 그랬다. 그러나 세심한 공을 들인 만큼 솔트레이크 시티는 위대한 낙원에게 확실하게 보답했다. 굳건한 신앙으로 결집한 종교인들을 뿔뿔이 흩어 놓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다 타고 남은 장작더미에서 희미한 불씨가 피어오르곤 하듯이 의지할 것을 잃은 인간들은 새로운 지주를 찾아 나서는 법이므로―얼굴 없는 지도자는 단순한 시장을 넘어, 일종의 인도자mother로 부상했다. 위대한 낙원은 시민들의 망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만큼 외로운 사회였다. 무심한 침묵의 도시들이었다. 그렇게 프로그래밍이 된 안드로이드만이 친절하게 인사하는 곳이었다. 약물에 중독된 인간들은 때때로, 어쩌면 그보다 더 자주 착란에 빠졌다. 그럼에도 더 이상 굶주릴 필요 없는 나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이들이 위대한 낙원을 꿈꾸었다. 그러나 낙원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삶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외부에의 무관심이었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의 기저에 체제의 선택적인 방임이 있었다. 그래서 수년이 지나도록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에 띄지 않았거나, 눈에 띄기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들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리라.
13th Jul, 2233
미라클의 우주선에서 내린 글래시어는 옛 5구역 주민들(물론 그 자신은 5구역에 대한 조금의 지식조차 없었으나) 두어 명과 벌인 약간의 실랑이 끝에,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 잠시간 ‘불모지 행성 탐사용 하반신 파츠'를 뗀 채 돌아다녔다. 다시 말해, 반중력 공학기술이 적용된 그의 상반신만이 중앙우주정거장 내부를 배회했다는 뜻이다. 달리 의도해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시민들의 주목을 약간 받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글래시어만큼은 그렇게 여겼다.
어쨌거나 이 산책은 다른 이들이 상상했을 양상보다는 더 무의미했는데, 그 이유인즉슨 글래시어가 식료품을 모을 만한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우주선의 원활한 가동을 위한 비상 전력과 동력원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24th Nov, 2120
제아무리 지구가 멸망했다 하더라도 모든 국가가 세계의 정세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낙원이 뿔뿔이 흩어졌던 미합중국의 각 주를 한데 모으고 있다는 소식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미 대륙 전역의 무역로들을 통해 천천히, 오랜 기간에 걸쳐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사실부터 지나치게 부풀려진 소문까지 시답잖은 이야기를 떠들어댔지만, 그러한 소식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여전히 유엔의 회원으로 남아 있던 국가들이었다.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던 미합중국이 연방 정부를 상실하고 주 단위 체제로 나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하고, 남은 주요 4개국 중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이 각자의 정치·경제적 사유를 들며 빠져나간 가운데 영국 연합왕국과 프랑스 공화국이 수몰되자 남은 회원국들은 사실상 머리를 잃은 몸이 되었다. 때문에 ‘존재를 알 수 없는 지도자에 의한 미합중국의 재통일 가능성’은, 설령 그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다른 국가들에 있어서는 일종의 잠재적 위협이자 견제해야 할 미래였다.
유엔은 인권 이사회를 통해 위대한 낙원에 대한 인권침해 감시 결의안을 발의하고 조사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그들을 제재하려 했다. 위대한 낙원은 인간 시민들을 ‘고유 식별자’로 관리 구분하며, 시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저해할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 ‘비불안’의 무차별적인 유통을 방임한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했다. 다만 위대한 낙원을 새로운 국가로 볼 수 있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 그 규모에 비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회원국들이 많아 그러한 논의는 결국 무산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국가 대사들이 회의에 대면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굴 없는 지도자는 화상 회의가 개최됨과 거의 동시에 유엔 인권 이사회가 자신에게 통보하려던 일에 대한 소식을 포착했다.
위대한 낙원은 미 대륙 동부로의 확장만을 앞둔 상태였으나 글래시어는 여전히 공학자의 성에 있었다. 어디에나 계시는 얼굴 없는 지도자께서 솔트레이크 시티와 캔자스 시티, 모터 시티(옛날에는 디트로이트라고 불렸다지?)에도 친히 강림하셨음에도 신 시티는 위대한 낙원의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많은 물자와 사람이 황무지를 거쳐 도시 사이사이를 오가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만을 깨우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셈을 하거나 글자를 읽는 법이었지 결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논쟁하는 법이 아니었다. 기술적인 발전은 자연스레 저해되었으며 도태에 가까운 평온함이 지속되었다. 위대한 낙원은 차차 격리되고 있었다―외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킴으로써 저지른 실수의 전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글래시어에게 대혁명은 여전히 저번이었고, 또한 미합중국에서 일어난 모든 반란의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부르고 싶었던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수많은 책임의 크기를 축소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이제 와 멈추기에는 너무나도 늦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통제로 하여금 인류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도…….
그러니 변화가 필요했다.
17th Jul, 2233
글래시어는 중앙우주정거장에서―사비로―구입한 임시 안드로이드 하체 부품을 장착한 채 공장으로 향했다. 쌍성계에 속했으면서도 드물게 테라포밍이 가능하다 거론되었던 행성 니다벨리르는, 글래시어가 속했던 평행 세계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단독 개발권을 취했기 때문에 우주 무역으로 인한 방문이나 단기간 입국이 아니고서야 들를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잠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금속 가공 공장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고작 ‘무지개’ 몇 개를 캐기 위해 힘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글래시어는 분리한 하반신을 한 팔으로 안아들고, 니다벨리르의 중력에 맞게 제어 장치를 조절했다. 기체가 일반적인 상반신의 높이에 위치할 무렵,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황급히 몸을 낮추어야 했지만 말이다. 디에고 토레스가 쏟아 놓은 레이저건을 남은 한 손으로 집어든 채, 그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다.
글래시어에게 지나치게 냉담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듯한 구석이 있는 것은, 그가 경쟁 사회와 정복이라는 행위에 익숙해진 탓이라는 것은 둘째치고도, 처음부터 그가 이 세계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컸다. 모두 책임질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실수를 저질러도,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어도,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더라도…… 그래서 좋았다.
누군가가 바닥을 구르며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주선이 코앞이었다.
2nd May, 2124
얼굴 없는 지도자의 또 다른 ‘분신’이 뉴욕 시티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는 미합중국이 완전히 재통일되었다는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로써 위대한 낙원은 미 대륙을 영토로 한 일종의 국가라 비공식적으로―사실 지구가 멸망한 마당에, 하나의 거대한 집단에 대해 자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실체가 유엔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불이익이 있겠는가?―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 낙원이 하나의 자주국으로서, 다른 국가들과 무역을 제외한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교류를 이어간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낙원에 부재한 것은 그들을 미래로 이끌어 줄 적절한 경쟁이었으나, 얼굴 없는 지도자는 사회 내에서 만들어지는 불필요한 다툼이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킨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는 저해된 기술의 발전을 끌어올릴 수 있을 만한 동기를 국가 외부에서 찾아야 했다.
2120년 11월, 위대한 낙원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에 기반하여 그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를 잠재적 흡수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것은 평온한 방식으로 개전되는 전쟁에의 비밀스러운 계획이었고, 또한 시민들이 스스로 과학 이론 및 기술의 개발에 뛰어들도록 동기를 부여하려는 목적의 일부였다. 외부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유사 전시 상황 속, 시민들은 여전히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었지만 국가를 위해 근무하는 것이 권고되었다. 특히 비불안의 장기 복용으로 만성적인 우울과 무기력에 시달리는 시민들은, 배급을 통해 부작용과 모순 반응을 조절하는 다른 약물을 처방받음으로써 사회 내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지원받았다. 무너진 교육과 사회 체계를 되돌리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교육자 및 기술자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대받으며 인간뿐만 아닌 안드로이드까지 가르쳤고, 효율적인 업무 수행을 위해 개발된 인공지능이 개인의 성향 및 상황에 최적화된 직무를 배정해 주었다. 그것은 물론 권장 사항일 뿐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큰 불만 없이 배정된 직무에 따라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22th Jul, 2233
글래시어에게 있어 불모지 행성이 아닌 외우주의 무중력 공간―다시 말해, 선체 정비나 물자 수집을 위해 우주선 바깥으로 나가는 것 말이다―탐사는 일종의 ‘사사로운 일’이었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하반신을 떼어 놓고, 상반신만을 이끌고서 에어락으로 향했다. 썩 내키지는 않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어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도. 그러나 한 번 쯤은 수많은 모니터 화면과 매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수천 페타바이트의 데이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남아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에어락의 문이 열렸다. 글래시어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26th Jul, 2233
글래시어는 거울 방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수많은 파편이 그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환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해서, 글래시어는 각각의 흐름이 자신의 사고 회로가 오류를 일으켜 생겨난 일종의 망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글래시어는 고대 그리스를 살아가던 한 조각가의 손에 의해 빛나는 흰 대리석으로 정성껏 빚어져, 지구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거대한 미술관 한가운데에 전시된 자신을 응시했다. 갈라진 거울의 틈새 사이로, 온몸을 천으로 감싼 안드로이드 하나가 신도로 보이는 자들에게 흰 가루가 든 봉투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파편들 속에서, 그는 오래된 기억 속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는 엔지니어 게일 파이만이었다. 한편에서는, 익숙한 모습의 안드로이드 하나를 필두로 일견 무의미한 목적을 내세운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매 순간, 상황에 따라 더 나은 선택만을 하도록 만들어진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다양한 평행 세계가 존재한다면 더 나은 선택이란, 더 나은 미래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선택해 온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글래시어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문득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느꼈다.
@아비가일
이윽고, 모든 것이 암전된다.
얼굴 없는 지도자의 또 다른 ‘분신’이 뉴욕 시티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는 미합중국이 완전히 재통일되었다는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지한 통신 기기가, 건물 외벽의 거대한 홀로그램이 송출하는 뉴스를 경청했다.
화면 한편에 누군가 서 있다. 글래시어는 그를 눈치채지 못한다.
위대한 낙원은 미국 동부로의 확장만을 앞둔 상태였으나 글래시어는 여전히 공학자의 성에 있었다. 그는 많은 물자와 사람이 황무지를 거쳐 도시 사이사이를 오가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대한 방의 한구석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글래시어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신규 벤조디아제핀 유도제 비불안은 신경안정제, 수면제, 진정제 등의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약국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비불안은 점차 갖가지 기호식품에 섞여 출시되기 시작했고, 비불안이 포함된 제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단 매대에 올라오면 불티나게 판매되었다.
북적이는 쇼핑몰의 한가운데, 누군가 묻는다. 글래시어는 그에게 닿지 못한다.
세상이 한참 멸망하고 있었을 때 라스베가스의 모습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반으로 꺾여 부서진 환경 운동 피켓은 커다란 쓰레기통에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고, 까끌한 모래 먼지가 바람에 섞여 휘날렸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코트의 깃을 세우며 바삐 걸어다녔다.
희뿌연 거리 너머에서 누군가 외친다.
글래시어는 그를 응시한다.
상대를 바라보면서 글래시어는 자신에게 어떠한 기회가 주어졌음을 막연히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손을 잡는다고 해서 자신이 돌아보았던 과거가 변할 리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글래시어는 문득 제게 주어진 이 새로운 선택지를 쥐어 보고 싶어졌다고 생각했다. 최선이 아닌 삶. 어떨 때는 차선을 선택하기도 하고, 심할 때는 최악을 선택하기도 하는 그런, 그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는 생生 말이다. 어둠 속에서 팔을 뻗어 허공을 더듬어 가며 무엇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금화인지를 구분해 나가야 하는…….
불현듯 그는 두려워진다. 이제 앞에 남아 있는 것은 더는 그 순간의 내가 옳았다고 확신할 수 없고, 내가 얻어낸 것이 최상의 것인지 항상 의심해야 하며, 나는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 위안할 수 없는 삶이다. 비틀거리고, 흔들거리고, 떠밀리며 나아가는 불안한 나날… 자신을 믿을 수 없어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 미련하게 한탄하고, 속죄하며 자조하는 매일.
그러나 불안정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음을 지독하게 느끼게 해 줘.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니까.
글래시어는 눈을 뜬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은 전과 같을 수 없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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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은 하잘것없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때 그 순간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삶은 지독하게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수많은 선택이 돌이킬 수 있었던 한낱 실수에 불과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어떤 존재는 끔찍하리만치 무가치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글래시어는 외롭다. 굴곡 없는 삶에서 오는 안정도, 해야 할 것을 마땅히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보람도 그의 고독을 해소해 줄 수 없음을 느낀다. 글래시어는 자신이 무엇인가 그리워하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간들처럼, 삶을 위해 살아가지 않는 자들처럼 돌아오지 않는 구시대의 나날들―Good old days―을 꿈꾸고 있는 것일는지도. 그도 아니라면, 길거리를 전진하다 객사한 무연고자를 보듯 굴어도 좋으니, 생면부지의 타인에게도 내어줄 수 있을 만큼의 온정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하나 우리는 타인의 온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는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마음껏 괴로울 수 있는 삶을 원해. 글래시어는 금속질의 몸체 사이로 사무치는 두려움과 슬픔을 감각한다. 결국, 인간은 제 발로 걷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헤매 보아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이지. 스스로 선택하려는 의지로 하여금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행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른 자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는 이제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채로, 혼자 나아가야만 함을 안다.
생生이라는 것은 잔혹하리만치 냉정해서, 그 모든 순간의 자신이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하여 그것이 최선의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을, 자신이 다시 태어난 인간이라는 증거를 손에 쥔 채 오직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세계라는 이유만으로, 불만족과 결핍으로 점철된 삶을 전환함으로써 책임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영속하게 하기 위하여
글래시어는
차원문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
시끄럽게 아우성치는 사람들
붉게 번쩍이는 사이렌
아,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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