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크리스마스의 악몽
글래시어는 제5구역에서 일어나는 기현상에 대하여,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험적 지식을 사용해 접근하려는 ‘일종의 본능’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그리고 모든 종교와 그것이 내세우는 교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비논리적인 종말이나 신이 내리는 형벌을 믿지 않는 자신의 내밀한 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섣부르게 외치지 않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특히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명령이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구는 눈앞의 이 여자는―감히 살펴보건대 근래 만난 그 누구보다도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에, 글래시어는 말을 가려 내뱉을 필요성을 통감했다.
“진정하시지요. 종말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실체 있는 위협은 모두 하나 되어 맞섬으로써 이겨낼 수 있으며, 실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위해도 끼칠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여자의 이마에 손끝을 얹었다가, 상대를 격려하듯 어깨로 옮겨 가볍게 두드리면서 글래시어는 무기질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전히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 힘드시다면 이것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자유와 평화는 함께 일구어내는 것이니 홀로 견디어 나가는 것이 힘드시다면 언제든 예연으로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품속에서 하얗게 말린 조인트를 꺼낸 그는 여자에게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한편 자치 구역의 주민들이 불필요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기현상의 정체를 추적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었으므로, 글래시어는 여자가 조인트에 불을 붙이기 전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잠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께서 보고 들으신 것은 무엇입니까?”
03. A posteriori
글래시어는 중심부 도시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가 제7구역에 머무를 무렵은 프로파간다로서의 예술에 대한 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반면 구시대의 유산들을 향한 검열은 철저하게 자행되던 시대였다. 시인은 입을 닫았고 화가는 붓을 내려놓았으나 새롭게 등장한 감시용 드론의 렌즈는 그 무엇보다도 밝게 빛났다. 의도하지 않은 악의로 점철된—무채색의 영상 속에서 인류는 완전한 침체의 역사를 맞이했다.
안타깝게도 글래시어는 그에 대해 어떠한 유감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는 지금보다 조금 더 가난했는데,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에 적응하기 바빴던 탓에 그나마 남아 있던 옛 문화의 잔재에 대한 관심마저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사’의 명의로 된 계좌에서 그리 많지 않은 돈을 출금하면서 글래시어는 무심히 생각했다. 모든 것이 그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글래시어는 신 시티 중심부 도시에 대해서 출신자들만큼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고, 그에게 있어 중심부 도시란 낙원이라기보다는 사회 간 불필요한 분리를 주도하는 동시에 인류의 관념적인 멸망을 가속하는 곳처럼 보였다. 현실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확률적 사건으로 정의한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신 시티의 후일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으로 판단했고, ‘공학자’라는 커다란 그림자 속에 감춰진 도시의 진실을 불필요하게 궁금해할 이유도 없다고 여겼다.
처참하게 망가진 안드로이드 ‘샐리’는 마음 한편을 처연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무기질의 물성에 가까운 진갈색 시선은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한 자세로 앉힌 샐리를 응시하다가, 곧 비스듬히 떨어졌다. 인파를 뒤로 하고 길거리로 나온 글래시어는 자신이 몇 개의 자치 구역들을 거쳐 오는 동안, 신 시티 중심부 도시가 얼마나 변했을지를 가늠해 보았으나 이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치 구역이 눈에 띄게 변질되는 사이 중심부 도시는 느린 쇠락을 겪으면서도 상상 이상으로 오랜 기간 동안 군림해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고려하지 못한, 일말의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도 존재하는 것일까?
글래시어는, ‘이 변수’에 대한 정보만큼은 자신의 현재 능력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때문에 그는 드물게도, 과거의 자신이라야 겨우 고려할 법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04. 환거
제3구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정확히 ■■■년 만이었다.
한정된 자원에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갈망하고 파괴하면서 예정된 끝을 향해 서서히 침몰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영혼의 본능을 존중하여—사람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악행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악순환을 묵과해야만 하는가? 또한 인류가 진정으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존재라면 인간종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부터 발견된 동행과 사랑의 증거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나타나게 된 것인가?
글래시어는 이러한 지점에 대하여 고뇌하게끔 태어난 자는 아니었으나, 법률과 도덕이 일견 무의미해진 세상 속 폭력과 관용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관한 가치의 저울질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인간’으로 나서였다기보다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글래시어는 다소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상당한 양의 선험적 지식을 필요로 했다.
그는 오래도록 떠돌았다. 아주 오래.
글래시어는 금이 간 부분에 하얀색과 붉은색의 페인트를 여러 번 덧칠한 듯 보이는 낡은 상점 앞에 서 있었다. 상점 앞의 도로는 어둠이 내려앉은 이후라면 쉽사리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탁 트여 있었는데―그는 이곳이 스프링 마운틴 로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차라리 공터에 가까워 보이는 건너편의 식당가를 응시하던 그는, 곧 상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자동 현금 인출기가 있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게 뭔지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다소 딱딱한 어조의 중국어라는 점을 차치하고도 그 내용마저 난데없는 질문에, 카운터 앞에 앉아있던 주인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런 그의 앞을 아내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로막으며 대꾸했다.
“웃기는 사람일세. 여기가 아니라 3구역 전체를 뒤져봐도 없을 거예요. 있어봤자 죄 낡아서 고장 난 기계들뿐일 거고.”
“그렇군요.”
“대체 몇 살이나 먹은 양반이길래 그런 고물 덩어리를 찾아요?”
대답하지 않은 채로, 글래시어는 멀지 않은 매대에 놓여 있던 술 두 병을 집어 들어 내밀면서 대신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혹 자유주의자 예술가 연맹에 대해 아십니까? 저는…….”
05. 정도
글래시어는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법률을 준수하는 것이나 일부 보편적 윤리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축에 속했는데, 이는 그의 행동 원리와 사고방식이 상당히 일방적이며 경직된 성질을 띤 까닭이었다. 그는 오직 특정한 행위로 인한 결과의 가치를 정량적으로 저울질할 수 있을 뿐인 작자이므로, 수많은 선험적 지식으로 하여금―폭력을 저질러 사람을 압제하는 것보다 관용과 회유를 사용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편이 당장은 불편할지언정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된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 정작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글래시어와 다른 자들의 본질적인 차이점 중 하나였다.
‘올바르다’는 단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글래시어는 너무나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시대의 서적과 논문, 그리고 충분한 시간조차도 그에게 명쾌한 정답을 내어주지는 못했으므로―그는 결국 단순한 듯 보이는 논리의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약물의 중독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구시대의 사람들이 이를 완전히 금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법률까지 바꾸어 가며 허용한 이유를 들어 술과 대마초를 제5구역에 퍼뜨리고, 모든 예술가는 대우받아야 한다는 선서를 내세우며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비윤리적인 행동들을 다수 묵과한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자신이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이한 확신이 있었다.
제6구역은 제5구역이나 제3구역에 비하면 조용해 보이는 곳이었다. 자동 현금 인출기를 찾아다니는 일이야 진작에 포기했고, 대신 글래시어는 주변을 조금 더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이 근방에 ‘6'이라는 숫자가 붙기 전, 이곳은 제3구역과 커다랗게 묶여 스프링 밸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글래시어가 아무리 구시대의 잔재를 잊지 않았던들, 이곳에는 그가 기억하는 것들의 아주 작은 파편들만이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이었다. 기실 글래시어가 계승하려 노력하는 것들마저 그 실상은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나 이 상념이라 할 법한 것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걷고 있을 무렵 문득 들려온 말소리 덕분이었다. 글래시어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응시했다.
“당신, 예연의 교주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약쟁이 새끼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교주께서 이곳까지 친히 행차하셨다고 말이야.”
06. 눈에 띌 일은 하지 말라고
중심부 도시의 광경은 아무리 공학자의 명령으로 인해 상당수가 검열되어 있었다 한들 글래시어가 사전에 수집할 수 있었던 정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건물 양식들을 대부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자치 구역들과 다르게, 높은 콘크리트 성벽 속 도시는 백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외따로 발전해 온 듯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있는 마천루, 반질반질한 건물의 외벽을 비추는 형형색색의 홀로그램과 불빛을 반짝이며 도시 곳곳을 힘껏 내달리는 모노레일… 공학자의 도시에 입성한 뜨내기들이 얼마나 추레하고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는지는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바닥에 카메라의 렌즈를 고정한 채 쓰레기를 주워 담는 안드로이드를 응시하던 글래시어는, 스탬프가 찍힌―장갑 낀 손등을 매만져 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신 시티 고철 폐기장의 분위기는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적막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언가 부서지고 으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버려지거나 망가진 안드로이드들과 그 밖의 기계 장치들을 위한 이 거대한 무덤에서 글래시어는 향수라 이름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한 구석이 있는 몇 가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일종의 위안이기도 했는데, 그로서는 답지 않은 일이었다.
수 시간 뒤, 글래시어는 모델명 ‘샐리’에 들어간다고 알려진 핵심 부품 두어 가지를 찾아냈다. 수색보다는 산책에 가까웠던 여정을 끝마치고, 손에는 자그마한 고철 덩어리들을 든 채 중심부의 광장으로 돌아온 그는 숙소에 체크인할 준비를 하기 위해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흰 천을 두르고 가면을 쓴 채 거리를 활보하는 장신의 인영을 마주친 사람들이 그를 흘끔거리며 수군댔으나 그것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즉시 발급 신청한 카드를 수령하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테일러 그랜트.”
08. 접속
그에게는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읽었던 소설 속에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정보 속에서 단어들을 끄집어내어 만들어 낸 일종의 얼굴 없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이름은 시간이 지나며 잊혀졌고, 또 다수가 지워졌다. 일부는 그의 손으로 버리기도 했으며 어쩔 수 없이 버려야만 했던 이름들도 있었다. 아가사 오’켈리가 그랬고, 테일러 그랜트가 그랬고, 캐서린 에반스가 그랬다. 하지만 글래시어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중 어떤 것이 그에게 가장 적합했느냐 묻는다면, 사실 어떤 것도 그의 진짜 이름은 아니었으매 아주 가벼운(보통은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오직 글래시어만이 그나마 의미를 가졌다.
‘글래시어’는 그가 처음으로 갖게 된 이름이었다. 동시에 가장 경시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글래시어는 신 시티 고철 폐기장으로 향했다.
테일러 그랜트는 신 시티 네트워크 서버에 접속해 있었다.
감상적인 자라면 쉬이 외로움을 느낄 법한 이 적막한 죽음의 땅에는, 제 의무를 다한 기계 장치들의 시체들이 널려 있다. 이곳에서 날짜 설정 기기를 찾아내는 것은 아마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반대로 수많은 통신 회선이 교차하는―이 거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그는 기실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찾아낼 수 있었을 테지만, 여즉 ‘원하는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미지의 세계로 남겨 두었다.
무감한 진갈색 시선이 잔해들을 헤집는다. 그것은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이다.
눈 대신 귀를 필요로 한 공학자는 우리로부터 무엇을 듣고자 했을까? 반동분자들의 불온한 속삭임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글래시어는 그나마 제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품을 하나 찾아낸다.
그와 동시에 테일러 그랜트는 신 시티 내부 보안망을 해킹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는 제 손에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힘을 주어 그러쥔다.
09. Reinforcement
누군가 그더러 죽음이 두렵냐 묻는다면, 아마 글래시어는 아니라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지난 세월 동안 몇 번이나 닥쳐 온 죽을 위기를 무엇 때문에 기를 쓰고 면해 왔는가? 글래시어는 생각한다… 생은 언제나 사보다 가치 있다.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 받을 수 있는 기회의 연속이라면, 죽을 이유는 당연히 없지 않은가…….
10. 학습
세상이 한참 멸망하고 있었을 때 글래시어는 여전히 라스베가스에 있었다. 반으로 꺾여 부서진 환경 운동 피켓은 커다란 쓰레기통에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고, 까끌한 모래 먼지가 바람에 섞여 휘날렸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코트의 깃을 세우며 바삐 걸어다녔다. 그 무렵 이름보다는 공학자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새로운 대표가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거의 동시에 도시가 중심 도시와 열세 개의 자치 구역들으로 분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머지않아 라스베가스―신 시티의 중심부에 두껍고 높은 벽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 도시-자치 구역 체제에 반발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중심 도시의 거주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염원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시민들은 금세 익숙해졌고, 낙원의 명성은 점차 드높아졌다. 기계 장치와 홀로그램으로 가득한 땅 주위를 둘러싼 콘크리트 성벽만큼이나.
글래시어는 일련의 광경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사고’란 그저 어떻게 하면 더 큰 보상을 취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일 뿐이었던 탓이다. 다만 분명한 점은 글래시어가 신 시티 중심부 도시와 그것의 후일을 제법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이고, 때문에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진실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채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조금 더 일찍 행동했더라면 무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거나, 이제 와서 공학자의 체제를 뒤엎기에는 너무 늦었다는―보통의 인간들이라면 으레 하곤 하는 일말의 후회나 좌절조차 맛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글래시어가 그렇게 태어난 덕분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이 진실된 정답이든. 오직 그것만을 바랐다…….
날카롭게 울렸던 몇 발의 총성과 손끝으로 전해져 오던 진동의 감각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글래시어는 유랑자들이 나누어 주었던 휴대용 대 로봇용 권총을 손에 쥐었다. 무기질적인 진갈색 눈으로 샐리 메디슨을 응시하던 그는 곧 허리를 숙여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11. 구별
타인에게 신체적, 정신적 위협을 가하거나 폭력을 행하지 마십시오.
글래시어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곰곰이 돌이켜 본다. 그러노라면 필연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불가피한 폭력은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뇌에 부딪치게 된다. 대답 대신 총성이 울린다. 그는 아직까지는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한다—그러나 고찰이 이어지는 것도, 글래시어가 결국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또한 인간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12. 변화
글래시어에게 있어 더 나은 인간이라는 개념은 단편적이지 않지만 사실 아주 단순하다. 도덕적인 인간, 부유한 인간, 권력 있는 인간, 아름다운 인간(사실 이것은 그로서는 이루기 어려웠다), 유명한 인간… 개인을 이루는 수많은 개념들을 정량화해서 수치를 비교하고, 숫자가 더 크다면 더 낫다고 판단한다. 가난한 자에게 베풀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사람보다 나을 수는 없다. 높은 지위와 유명세는 영예와 명성을 가져다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며, 시대의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아름다움과 부는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이 된다. 그러한 가치들을 손에 쥐는 것은 글래시어에게는 그 자체로 일종의 보상이다. 성취에 따른 기쁨이나 보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기후 재난과 지구 온난화로 지구가 완전히 사막화되기 전까지, 글래시어에게는 그리 거창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환경 운동을 하거나 공익 광고를 만드는 것이 나름의 일과였다. (남들은 이를 퍽 우스꽝스럽다 여겼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지구는 결국 모래와 먼지와 바닷물로 뒤덮여 멸망했고,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더라도 더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는 오래도록 고민해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세상 그 자체를 위해 행동하지 않고서도 자신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그리고 글래시어는 점차 저물어 가는 폭력과 무질서의 시대에서 더 나은 사회를 세울 수 있다면,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상호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또 어떤 구시대적인 가치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의외로 눈앞의 이익보다 우선하므로—
자유주의자 예술가 연맹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순전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와, 더 나은 사회를 바란다는 그나마의 공익의 목적이 결합되어.
적막이 도시에 짙게 깔렸다. 기실 글래시어에게 신 시티가 무너진 뒤의 세상은,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계였다. 눈을 가리는 어둠 속에서 팔을 뻗어 허공을 더듬어 가며 무엇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금화인지를 구분해 나가야 하는…… 그러나 오직 수백, 수천 대의 안드로이드들이 도시에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만이 달랐다.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 장치들. 인간이 될 목적으로 태어난 자들. 인간들.
그는 고개를 돌려 저편의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글래시어는 자신이 더 이상은 전과 같을 수 없음을 알았다.
13. 자유
2057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에서 로봇 공학자인 게일 파이만이 오로지 전시회에 출품할 목적으로 인간을 닮은 한 안드로이드를 제작했다. 게일은 아주 최소한의 행동 윤리와 학습 원리—이를테면, 강화 학습 같은—만을 사용하여 인간을 한계까지 닮아갈 수 있는 피조물을 만들고 싶어 했고, GL-003이라는 이름의 이 안드로이드는 두 번의 실패를 거친 끝에 태어난 완성작이었다. 전시회는 라스베가스에서 개관되었으나, 한참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상용화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21세기 중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드로이드가 과연 목적(물론, 예술 작품으로서의 목적과 가치는 존재했지만 말이다) 없이 살아감마저 인간을 모방할 수 있는지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또는,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자신들을 대체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또 만에 하나 GL-003에 상상 이상의 잠재력이 내재하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감정을 모방하는 기능조차 존재하지 않는 안드로이드더러 인간을 ‘완벽하게’ 닮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몇 주 뒤 전시회는 조용히 마무리되었고, 게일은 텅 빈 홀에서 작품들을 정리하며 GL-003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에게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거두어 키울 의향이 얼마든지 있었다. GL-003은 이대로 버려진다면 폐기 처분될 위기를 면하지 못할 터였다. (당연하겠지만, 자기 행동을 스스로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정부나 소유자에게 귀속되지 않은 채 돌아다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게일에게 제발 자신을 거두어 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하며 빈다면 일종의 부모 된 입장으로서 게일은 그러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점은 고사하고, 아마 더할 나위 없이 기쁘리라. 그러나 그 무기질적인 진갈색 시선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GL-003이 그를 향해 무어라 속삭였을 때—게일은 자신이 만든 것이 적어도 자신이 원하던 이상적인 여인 Galatea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피조물을 향해 경외심보다는 두려움을, 환희보다는 짜증을 느꼈고 결국은 깊숙한 골목 한가운데 GL-003을 유기하기로 결론 내렸다.
그렇게 GL-003은 사실상 자유의 몸이 되었다.
14. 귀환 @해피
날카로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치던 낮이 지나고, 서늘한 공기가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한 밤이었다. 붉은빛으로 타들어 가는 모닥불 옆에 앉아, 글래시어는 끝이 다 닳고 뻗친 붓으로 팔이며 다리 곳곳의 틈새에 파고든 모래 알갱이들을 털어냈다. 온몸을 몇 장이나 되는 천으로 겹겹이 둘러쌌음에도 불구하고 금속 질의 관절과 부품들 사이에 낀 이물질이 적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엉긴 온갖 먼지들을 빗어 쓸어내겠다는 생각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인공 피부로 온몸을 덮는다면 조금 더 형편이 나으려나. 그것은 지난 5년간 줄곧 해 온 생각이었으나 결국 한 번도 실천으로 옮기지 않은 생각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신체에 어떠한 ‘노력’이라 말할 법한 것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비를 찾아가 엔지니어 일을 배움으로써, 스스로 제 목숨을 연장할 수 있게끔 한 것은 그 나름의 변덕일 것이다.
또는—일종의 책임감일 수도 있으리라. 미 대륙에는 여전히 자유주의자 예술가 연맹이 있었고, 그것은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로 무기물의 파편이 되어 사라질 뻔한 글래시어가 만들어 낸 최대의 작품이었다. 샐리 메디슨과 유랑자들이 커다랗고 빨간 버튼을 눌러 신 시티 체제를 붕괴시킨 이후로, 글래시어는 결국 맞닥뜨리게 된 일종의 자기모순과 안일함이 불러일으킨 죄책감을 비롯한 모든 것에서 차라리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자들에게 술과 대마초를 뿌리며 도시들을 전전하는 일을 새로운 삶의 낙으로 삼았던 것이 결론적으로는 예술가 연맹의 몸집을 불리는 데에 한몫했으므로 그는 이제 마음 놓고 떠나버릴 수도 없었다. 기실 예술가 연맹의 구성원들 중 그 누구도 글래시어를 그리워하지 않고 다만 그가 건넸던 약물만을 애처로이 원하겠으나, 약쟁이들의 메시아란 원래 그런 법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불씨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짙게 내리깔린 적막을 겨우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긴 나뭇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모닥불을 뒤적이던 해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날이 오면 신 시티에 모이자던 약속이라…….”
“…….”
“돌아갈 건가요? 5구역으로….”
글래시어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리개와 초점을 비롯한 카메라의 수치들을 아무리 조절해도, 먼지구름에 가려진 밤하늘 너머로 별 무리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글쎄요… 기계음 섞인 음성이 길게 늘어졌다. 그에게는 삶을 억지로 이어 나가고픈 열망도 없었거니와, 그 삶이 우주에서 지속되는 것이라면 마음에 걸리는 점이 더더욱 많았다.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속여야 했으며, 그것만큼 질리는 일은 다시는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몇 분 가량의 적요 끝에 글래시어가 해피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자, 해피는 다소 침체된 낯으로 그를 마주 응시했다. 불만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 그 얼굴을 흘긋이면서 글래시어는 들고 있던 붓을 배낭 안에 쑤셔넣었다. 그가 다시 손을 꺼냈을 때, 거기에는 잘 말린 조인트가 하나 들려 있었다. 글래시어는 장갑을 태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조인트에 불을 붙여 해피에게 내밀었다.
“……예, 돌아갑시다.”
15. 바다
내슈빌은 이상 기후로 인해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바닷물에 집어삼켜진 캘리포니아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오래전에 저장해 두었던 지도에 의지하여 대해 아래로 사라진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가면서 글래시어는 자그마한 웅덩이 하나조차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는데, 그것은 그의 기체에 방수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탓이었다. 15번 국도와 모하비 국립 보호구역 주변은 다행히도 건조했지만, 빅터빌 부근에 진입했을 시점에는 많은 곳들이 물에 잠겨 있었다. 글래시어는 비가 내리지 않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백여 년 전만 해도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을 대도시 근처를 피해 해안선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리버사이드에 도착해서는 결국 자그마한 배를 한 척 *빌려야* 했는데, 노를 젓는 것은 물론 지치지 않는 글래시어의 몫이었다. (더해서, 해피가 물장구를 치다가 그의 쪽으로 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글래시어는 물 위로 드러난 잔해를 피해 한참 노를 저었다. 나룻배 아래로 펼쳐진 바다는 깊고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 없는 수면 위에서 그들은 오직 낡아빠진 데이터의 파편들과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해 떠 있었다. 그러나 높게 솟아오른 고층 건물들의 숲을 벗어나 그들 자신 말고는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무렵,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몇 번이고 재생했던 광경이었지만,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기도 했다. 글래시어는 움직임을 멈추고 꾸벅거리며 졸던 해피를 깨웠다.
노를 하나 집어 들고, 글래시어는 가장 멀쩡해 보이는 나룻배 한 척을 밀어 물 위로 띄웠다. 내슈빌의 모습은 그때와는 결코 같지 않지만, 어떠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으므로—그는 배에 올라타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물에 반쯤 잠겼으나 창문이 죄 깨진 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어떤 폐건물에 다다랐을 무렵, 글래시어는 노를 젓는 것을 그만두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16. 교주
글래시어가 자유주의자 예술가 연맹을 처음 만들었을 때, 연맹은 사실상 머무를 곳이 없거나 먹고살 돈이 없는 자칭 예술가들이 모여 합법적으로―물론 법률이라는 것이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대마초를 빨기 위한 곳이었다. 그러나 글래시어가 예술가뿐만 아니라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선뜻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연맹을 구성하는 자들의 수는 입소문을 타고 금세 불어나, 연맹이 제5구역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맹의 초기만 해도 그는 창시자나 우두머리, 회장과 같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십 년, 이십 년이 지나고 세대가 교체되기 시작하자 노화하지 않는 그의 특질이 인간들 사이에서 유난히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글래시어가 사람들을 자유와 평화의 길로 인도한다는 점을 들면서 그를 신격화하는 자들이 생겨났을 무렵, 많은 인간은 그것을 반신반의했고 결국에는 종교 집단의 지도자―다시 말해, ‘교주’라는 다소 변질된 수식어만이 남아 그의 명성을 뒷받침하는 단어가 되었다. 글래시어를 교주로 섬기는 자들은 처음에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지만, 연맹에 속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연맹에 소속되기를 두 세대 정도 거듭하고 나자 많은 자치 구역에서 자유주의자 예술가 연맹의 ‘교주’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자가 거의 없게 되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글래시어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엇으로 부르든 단 한 번도 정정해 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냐가 아니라, 어떤 위치에 올라앉아 있는지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시자로 불리든, 교주로 불리든―여전히 자유주의자 예술가 연맹의 우두머리임은 변함이 없었으므로.
굳이 기를 쓰고 변장할 필요조차 없이, 글래시어는 평소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자들에게 몸에 두른 겹겹의 천을 나누어 주느라 적어도 몇 시간 전보다는 가벼워 보이는 행색이었다는 것이다.
타종과 함께 사람들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하얗고 이질적인 건물에 섣부르게 진입하는 것은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특정 종교를 연상시키지 않기 위해 힘쓴 듯 보이는’ 건축물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숭배하고 있을지가 상당히 궁금했기 때문에, 글래시어는 무언가 잊은 사람이라도 되는 듯 다급한 모습으로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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